관극후기 : 부산 연극 <민중의 적>
연출 강성우, 극단 누리에, Henrik Johan Ibsen 원작
2019.09.10 한결아트홀
토마스 : 양경문 / 피터 : 이혁우 / 히일 : 호민 / 세실리 : 오희경 / 홉스타드 : 고현우 / 호스터 : 우지현 / 페트라 : 김채윤 / 빌링 : 김성동
제작 : 강봉금, 조연출 : 김아라, 움직임연출 : 윤시내, 조명디자인 : 김철현, 분장 : 박은주, 의상 : 이희선, 음향 : 정재희, 무대 : 임지안, 조명OP : 최주영, 홍보 : 황유나, 진행 : 이태성 김채윤
침묵하는 다수, 진실을 외치는 소수,
누가 '민중의 적'인가?
○ 줄거리
마을의 중요 수입 수단인 온천 개발을 앞두고 온천개발 이사회의 의료주임을 맡고 있는 토마스 박사는 배수 시스템이 심각하게 오염된 것을 알게 된다. 그가 홉스타드와 빌링을 포함한 공동체의 여러 회원들에게 경고를 하자, 그는 마을을 구하게 된 발견에 대해 감사의 말을 듣게 되고 동시에 관대한 지원을 약속 받게 된다.
다음날 아침 토마스 박사의 친형이자 지역구 국회의원인 피터는 마을의 경제적 타격을 우려한 나머지 불편한 진실을 숨길 것을 강요하며, 그의 발견들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 두 형제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지만 토마스 박사는 적어도 지역 언론과 민중은 그를 지원할 거라는 믿음을 가진다. 그렇지만 피터의원은 신문사를 찾아와 편집장인 홉스타드와 발행인 세실리로 하여금 토마스 박사의 반대편에 설 것을 설득시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토마스 박사와 그의 동료 호스터와 페트라는 온천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모집하게 되는데…….
● 연출의 글
경제적 관계를 특혜 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민중의 적"은 재미있는 연극이다. 1882년 현대 연극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극작가로 꼽히는 인물 노르웨이의 극작가 Henrik Ibsen의 사회비판 드라마로 정치적 저항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다. 그것은 진실과, 우리 시대와 경제의 지배 하에서 그것이 어떤 기회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의문시되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또한, 언론이 조작됐을 때 진실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 진실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부패로 유혹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지금 이곳은 19세기 노르웨이가 아니다. 오랫동안 죽은 노르웨이가 혹은 입센이 이 시대 이곳의 우리에게 할 말이 남아 있는 듯하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우리의 암울한 현재를 소스라칠 만큼 닮아있다. 진정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힘 앞에서 그 사실이 거짓이 되어야만 살 수 있는 세상. 그 힘에 의해 형성된 군중심리에 의해 분명한 잔실을 외침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혀 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힘이자, 입센이 세계적인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가는 힘이 아닐까? 누군가는 훨씬 더 깊이,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즉, 나쁜 일은 나쁜 개인이나 신의 우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개혁될 수 없는 정치와 경제 세력 전체에서 비롯된다. 입센은 인간의 삶을 경제 성장에 종속시키는 사회에서 진실은 번성할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토마스와 같은 인물들이 그들의 도덕적 인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내밀었다. 극의 끝에는 토머스가 요란하게 반항적으로 남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혼자 서 있는 사람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연극의 역할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세계관을 강요하거나,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지를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 시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함께 따라야한다. 현재 모순에 대한 진지하고 진실 된 솔직함이어야 한다. 신기하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이 관심은 많은 관객들에 의해 수년간 공유되어 왔다.
이 작품에서 용기와 도덕적 청렴에 관한 단순한 심리극과는 거리가 먼, 그 사회적 맥락의 긴급성, 즉 사람들이 개인적인 것보다 경제적 관계를 특혜 하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정치적, 사회적 상처를 드러내 연극에 솔직해지고, 원작의 핵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제 이러한 연극을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
○●○●
여기, 한 마을의 온천수 수질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연구실이 있습니다. 진보적인 기사를 주로 싣는 신문사의 주필 홉스타드와 기자 빌링, 연구실의 젊은 박사 토머스와 연구원 호스터, 페트라는 함께 술을 마시며 친목을 다지는 중이죠.
평소처럼 시끌벅적한 이들 사이로, 박사 앞으로 도착한 편지 한 통이 문제를 발화합니다. 사실 토마스박사는 급증한 장티푸스환자와, 전염병을 온천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여 수질검사를 의뢰하였고, 그 분석보고서가 편지로 날아든 것이죠.
그런데 보고서에는 그들이 연구하고, 개발중인 온천수가 세균의 온상이라는 결과가 적혀있습니다. 상류에 위치한 가죽공장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로 인해 이미 오염이 심각한 상태라고 합니다. 토마스 박사는 자신의 의심이 옳았다며 이 사실을 이사회에 보고서로 알리고, 사람들에게도 알려야겠다고 합니다. 함께 술을 마시던 홉스타드는 자신의 신문사에서 이 일을 특종으로 다루겠다고 약속도 하죠.
그러나 이들이 사는 마을은 그 온천수를 기반으로 운영중인 요양시설과, 관광산업이 수입의 전부인 곳. 국회의원인 그의 형 피터는 보고서에 쓰인 내용을 극단적이라고 비판하며 동생을 몰아세우기 시작합니다. 수로를 가죽공장보다 윗쪽으로 옮기는데에는 자그마치 2년이라는 시간과, 한 해 예산의 두배가 넘는 돈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을 정화할 다를 방법이 있을 거라거나, 혹은 물을 다시 검사하여 다른 결과를 내라고까지 강요하기에 이릅니다.
피터는 과학자이자 의사입니다. 진실에 대해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형의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강조하며 그 물을 계속해서 이용하는 것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두 사람은 합의점 없이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고, 결국 토마스는 권위로 자신의 발언권을 눌러 막으려는 피터에 대항해 이 문제를 신문을 통해 공론화할 계획을 세웁니다. 민중들이 자신의 편에 서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민중이란 무엇인가
민중, 백성 민(民) 무리 중(衆).
국가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 전체 다수의 국민. 특히 피지배층을 이루는 주변인을 이르는 말이 민중입니다.
피터는 극 초반에 이런 얘길 합니다.
"전체의 복지를 책임지고 있는 권위에는 복종을 해야된다, 그 말이야."
21세기인 지금, 몇몇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주의 법치국가입니다. 책임이 권위가 되고, 그 책임을 지는 자에게 국민의 권리를 위임하는 시스템이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허나 그의 발언에는 주권의 주체자가 잘못 설정되어 있습니다. 극과 현실 양쪽에서 모두 교묘하게 지우고 있는 사실. 주권자는 이 극이 민중이라 지칭하는 이들, 온천수 요양원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주민들, 그리고 이 극을 보고 있는 우리 모두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민중들에게 사실에 기반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신문사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자칭 진보적인 인물들입니다. 기득권이 무너지는 걸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나쁘면 다 까야한다고 말하던 주필은 이 온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금을 더 내야한다는 결과값을 알게 되자 돌연 태도가 바뀝니다. 그런 그의 태도를 예상이라도 한 듯, 피터는 다른 전문가가 작성한 보고서를 들이밉니다. 시설을 약간 변경하고 관리를 잘 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이제 신문은 토머스의 보고서를 싣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합니다. 토마스는 '내겐 진실이 있고, 민중이 함께 한다'고 선언하고 전단지 인쇄를 주문하지만, 신문사 발행인은 마을을 망칠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언론도, 정치도 썩었다고 화내 보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보고서를 발표할 길이 없어보입니다.
언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중반부쯤 극이 흐르면 페트라는 빌링이 흘리고 간 노트를 돌려주려다 신문에서 연재중인 글이 그들의 지향점과 전혀 맞지 않다는 사실에 어이없어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기사에서 사건의 본질에서 어긋난 시각에서 쓴 문장들을 흔하게 발견합니다. 또 신문의 지향점과 달리 특정 인물에 대한 악의적이고 편향적인 기사가 매일 발표되기도 하죠. 문제는 그것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면 기사 외의 현상들과 흐름을 알기 위해 독자가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전체를 균형있게 보고 객관적으로 보도하지 않습니다. 팩트를 전달하려는 것 또한 인간이기에,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극 중 강연회 씬에서 잘 드러납니다. 토마스는 강연을 통해 온천수의 위험성에 대해 알리려고 하고, 그의 의도를 잘 아는 피터는 신문사 사람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연을 듣기 위해 모였지만 사회자를 원하고, 사회자가 선출되자마자 강연은 회의가 되버립니다. 민주주의를 빙자한 회의석상에서 피터는 '아무말이나 할 권리'가 민주주의인 줄 아냐며 극단적인 예를 들며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마을이 곧 망해버릴것만 같은 나쁜 예를 들며 피터를 공격하고, 그와 반대되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포부처럼 주장하며 지지를 얻어내는 그의 모습은 선거철 흔하게 볼 수 있는 유세현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언론은, 신문사는, 무엇을 위해서 이들의 이야기를 편의대로 다룰까요? 그들이 신념과 이익 사이 어디쯤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수용해야 할 것과, 걸러내야 할 것을 결정해야 하는 것은 독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준점을 어디에 둬야할지 선뜻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는데에 시간이 걸립니다.
삶의 기반이 되는 경제적 원천이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 먹고 사는 일이 다시 힘들어질거라는 불안, 그럼에도 그 물을 마시고 이용하기엔 꺼림칙한 마음들이 당장 온갖 목소리와 야유로 모습을 드러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변증법의 오류
극 중 토마스 박사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습니다. 그들의 방식에 맞춰 발언권을 얻었지만 보고서를 읽을지 말지를 투표에 부치는 상황에 놓이고 말죠.
결국 그는 감정적으로 대처합니다. 자신에겐 주어지지 않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언론을 조롱하고, 야유를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의사소통을 나눌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근거로 의사가 아닌 수의사가 필요한 것 같다며 시민들을 동물이나 가축에 비유합니다.
토마스는 다수는 항상 옳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드는 예시들은 예수의 처형과,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판결입니다. 몇십년이 흘러야 소수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절규와 함께, 소수의 권리는 다수에게 공격받더라도 신성한 것이라고 말이죠.
여기서 문제는 그가 근거로 드는 사건들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도구로만 쓰일 뿐, 민중의 의문과 불안을 제대로 반박하거나 해소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라곤 없어보이는 신화나 진리와 온천수의 수질개선이 과연 민중들의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를 질타할 수 있는 걸까요? 진실을 이야기하는 대신 다른 해결책에 대해 모색하고 나아갈 순 없었던 것일까요?
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를 원칙으로만 해결하려는 그는 결국 스스로를 '민중의 적'으로 명명하고, 자신을 향해 분노하면서도 진실을 두려워하는 마을 주민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맙니다.
<의심하는 인간>의 의미
극 중 토마스가 주장하는 '민중의 명예는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것. 그러니 당신들은 민중이 아니다'라는 말에는 제 손으로 쟁취하지 않은 권리는 물론, 그에 대한 책임조차 질 수 없다는 역설이 들어있습니다. 극은 결국 그를 마을에서 쫓아내려는 주민들의 움직임 속, 외로이 서 있는 연구실 사람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죠.
하지만 관극을 마치고 나서도 한참동안, 그것이 그의 결론이 되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바탕에는 공포가 깔려 있습니다.
사실 박사는 주민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전염병 소굴이 되기 전에 마을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결론이 부정당하고, 발언권을 빼앗기고, 왜곡된 사실로 주민들의 분노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꼈을 때 그가 느낀 것은 공포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손발을 묶은 언론과 정치판에 대한 분노보다, 당연히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민중들의 분노가 더욱 크게 다가왔을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민중의 적'이라 명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맙니다. 그가 싸워야 할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언론이고, 은폐하려는 정치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우리는 언론이 얼마나 편향적인 보도를 할 수 있는지, 정치적 자본적 관계가 얽히면 사법부도 검찰도 언론도 얼마든지 한 쪽 방향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실을 알고자 했던 사람들이 매도당하고, 처벌받고, 공식적인 발언권을 빼앗겨 온라인 틈으로 폭로하면서 차츰 확실한 의문을 모두가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무엇이든 저울에 놓고 어느쪽이 더 무거운지를 재야하는 것은 우리입니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공포와, 그로 인해 주권을 잃고 가축 취급당하며 살게 될 미래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을 쥐고서.
공연에 대한 이야기
극단 누리에의 <민중의 적>은 객석과 무대의 구분을 크게 두지 않은 연출로 관객이 마을 주민이 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일단 주인공들이 등장하면서부터 객석을 가로지르고, 박사의 강연 장면에서는 객석까지 그 무대를 넓혀 여기저기서 까메오 배우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어 현장감을 느낄 수 있으며, 마지막 엔딩의 연구실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 또한 객석으로부터 무대를 향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에 극 속 문제의식이 작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는 연출이었습니다.
또 적절한 프로젝트 사용으로 마치 영화 속 인물 소개를 보는 듯한 오프닝과, 장면 전환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정확하게 전달해 주어 몰입감을 높여줍니다.
여기에 부산지역에서 이젠 원로배우라고 해도 좋을 이혁우배우와, 누리에에서 매번 탁월한 캐릭터를 보여준 양경문배우의 연기가 만나 장면마다 긴장감은 물론, 현실감 넘치는 형제연기로 소소한 웃음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다만 두 사람이 형제라기보단 부자지간 같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건, 피터의 희끗희끗한 포니테일 머리와 함께, 토마스의 친구 호스터의 힙스터 패션 영향도 있고, 메인 갈등구조가 두 사람이다보니 이혁우배우의 내공이 느껴지는 씬이 많아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립극단 공연에서 주로 만나던 오희경 배우와, 극단 아센의 호민 배우, 그리고 누리에의 고현우 배우와 김성동 배우는 어쩌면 이야기의 핵심을 관통하는 인물들입니다. 특히 추구하는 바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편의적으로 입장을 정리하는 캐릭터들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준 건 이들의 내공 덕분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연구원으로 박사를 든든하게 지지해 준 호스터, 페트라 역의 우지현, 김채윤 배우도 무대 위에서 제법 여유가 생긴 느낌이어서 좋았습니다. 이젠 두 사람의 연기합이 꽤 무대에서 빛을 발한다고 느꼈던 공연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의심과 오해의 홍수 속에서 어느 방향으로든 생각의 문을 닫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칠 권리가 없다는 진실. 그것만이 중요해야 할 19세기 노르웨이와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 오늘도 누군가의 의도와 목적에 의해 구불구불하게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극, <민중의 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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